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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김희중 주교 광주대교구 부교구장 임명] 김희중 대주교가 걸어온 길

곽승한 기자
입력일 2009-07-15 수정일 2009-07-15 발행일 2009-07-19 제 2657호 6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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모범적인 신앙인이자 성실하고 겸손한 사제
2005년 5월 18일 남동 5.18 기념성당 앞 기념비 제막식 때 김희중 대주교가 최창무 대주교, 문규현 신부 등과 함께 장막을 걷고 있다.
‘외유내강(外柔內剛)’·‘성실’·‘겸손’.

광주대교구 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단어들이다. 그를 측근에서 지켜본 이들이 “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”고 전할 만큼 김 대주교는 늘 자신에게는 엄격하나, 어린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른 이들에게는 항상 낮은 자세로 대하며 겸손한 자세로 살아왔다.

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김 대주교와 50년 지기로 함께해 온 송현섭 신부(광주가톨릭대 평생교육원장)와 고재영 신부(광주대교구 대성동본당 주임)는 “성실하고 겸손한 사제이자 모범적인 신앙인이며, 사제생활의 모범을 보여준 동료”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.

전남 목포가 고향인 김 대주교는 1947년 2월 부친 김용섭(베드로·1988년 선종)씨와 모친 박영님(율리아나·1995년 선종)씨의 3남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. 김 대주교가 목자로서의 길을 걷는 데는 전통적 구교우 집안의 신앙배경이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. ‘6남매 전부 다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길’ 바라는 부모님과 함께 매일 미사를 다니면서 자연스레 사제성소의 싹을 키운 것이다. 김 대주교의 형제들은 “대주교님은 동네 친구들이 흙장난을 하며 뛰어놀 때에도 집안에서 조용히 십자가와 성상 앞에서 보자기를 두르고 ‘미사놀이’를 즐기곤 했다”고 회상했다.

김 대주교는 목포중학교와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를 거쳐 오늘날 광주가톨릭대학교의 전신인 대건신학대학을 졸업했다. 1975년 당시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그는 이듬해 로마로 유학,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에서 ‘고대 교회사’를 전공했다. 김 대주교는 1983년부터 광주가톨릭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위논문을 작성, 1986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. 그가 귀국하면서부터 한국 교회의 ‘사도시대 초기교회사’ 연구는 더욱 탄력을 받았다. 김 대주교는 1983년부터 2002년까지 20여 년간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로 봉직한 참 스승이기도 했다. 그에게 수업을 들은 후학들은 “김 대주교는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엄격한 선생님으로서의 면모 뿐 아니라, 제자들을 아끼고 보듬는 ‘선배’이자 ‘아버지’의 모습도 갖췄다”고 입을 모은다. 김 대주교가 강의 시간에 ‘배트맨’ 흉내를 내며 신학생들을 폭소케 했다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유명하다.

김 대주교는 유학 시절부터 익힌 영어·불어·이탈리아어·라틴어·희랍어 등 5개 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한다. 또 작은 체구와 내성적인 성격을 가졌음에도 태권도 유단자(2단)이며 축구와 탁구 등 각종 구기 종목을 섭렵했다. 로마 유학 중에는 외국 신부들과 신학생들에게 직접 태권도를 가르치기도 했다.

지난 2003년 6월 김 대주교는 보좌주교로 임명되면서 가톨릭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“교구장님의 사목방침에 맞춰 사제단의 의견을 존중하고 교구민들의 뜻을 생각하며 광주대교구의 발전을 위해 모든 힘을 다 기울이겠다”고 전했다. 김 대주교는 그 약속을 지켰다. 그는 지난 6년간 최창무 대주교를 보필하고 교구민들을 사랑으로 감싸며 교구 ‘어머니’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. 부교구장 대주교 임명 당일 교구청 사제들이 “교구 사제 출신인 김 주교님께서 부교구장 대주교로 임명돼 더욱 기쁘다”고 전한 것처럼, 김 대주교와 교구 사제단의 관계는 돈독하며 서로간의 믿음도 강하다.

김 대주교의 가족으로는 큰누나 김복순 수녀와 형 석중(프란치스코), 작은누나 덕순(데레사), 여동생 정순(안나), 남동생 대중(요한)씨가 있다.
2008년 교구청 소풍때 교구청 사제단, 직원들과 함께 덕유산에 오른 김희중 대주교.

곽승한 기자